전쟁 이야기

카이사르, 갈리아전쟁(1)

Trab C 2021. 2. 2.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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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트랍 c입니다.

카이사르

안녕하세요 오늘은 갈리아 전쟁에 관하여 말해보려 합니다. 갈리아 전쟁에 관해서 말하려면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대해서 말을 안 할 수가 없는데요 카이사르는 기원전 100년에 태어난 인물로 로마 공화정 말기 삼두정치로 두각을 나타낸 뛰어난 정치가입니다. 또한 갈리아 전쟁을 지휘하며 갈리아에서 총독으로 머무를 당시 갈리아 전쟁을 치르며 군사활동 등을 기록한 갈리아 전기라는 기록문학 또한 집필하였습니다. 또한 오늘날 우리가 쓰는 단어 중에 카이사르에서부터 유례된말또한 많이 남아있는데요 영어단어인 시저(Caesar),독일어 카이져(Kaiser),러시아어 챠르(Czar) 등은 모두 황제를 지칭하는 말이라고 하는데요 이 모든 단어의 어원은 카이사르에서 부터 유례 되었으며 황제 중에서도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로 봤을 때 카이사르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었는지 짐작이 되기도 합니다.

당시 로마와 갈리아 그리고 주변의 지도

먼저 카이사르는 로마의 귀족 출신 이기는 하지만 처음부터 정치적 권력기반이 강했던 거는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였는지 카이사르는 다른 두 명의 유력 정치인과 연합을 하며 삼두정치에 나타나게 되는데요 그중 한 명이 폼페이우스라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와 혈연관계를 만들려고 자신의 딸 율리아를 폼페이우스에게 시집을 보내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또 다른 사람은 크라수스라는 인물로 로마 최대의 부호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크라수스는 유능한 정치가이자 장군이기도 하였는데요 크라수스는 스파르타쿠스의 난을 진압하기도 하여 자신의 실력을  보여주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3명이서 로마의 삼두정치를 이끌었다고 합니다.

폼페이우스

 

 

로마 공화정 말기 집정관으로 있던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그런 둘 사이에 나타난 사람이 카이사르이며 카이사르가 이 둘을 화해 시키겠다 하며 법안을 만들어 냈다고 합니다. 아무튼 이렇게 정치적 존재감을 드러낸 카이사르는 군사적 명성을 쌓기 위해 갈리아 원정에 나서는데요. 갈리아는 현재의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서부, 라인강 서쪽 독일을 포함하고 있으며 당시 로마는 유럽에서 최고의 문명을 사랑하고 있었지만 당시까지 갈리아의 경우에는 로마처럼 발달하지 못한 부족 사회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였는지 당시 로마인들은 갈리아 지역 사람들을 야만인이라고 생각했다 하는데요 카이사르가 갈리아 원정에 나선 결정적 계기는 당시 스위스에 살던 헬베티 족의 대규모 이주로 로마의 경계까지 넘어오며 카이사르는 군대를 보내 헬베티족을 다시 스위스로 밀어냈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야만족이라고만 생각했던 헬베티족이 생각보다 막강한 군사력을 가졌으며 산악지방인 스위스보다 프랑스 남부의 평원으로 대규모 이동을 하여 국가를 만들려 하는 모습을 보였으므로 당시 팽창 중이던 로마는 이를 가만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고 합니다. 이에 카이사를 가 전면에 나서며 갈리아 원정을 떠났다고 합니다.

크라수스

 

또한 카이사르는 갈리아 원정과 함께 브리타니아 원정 또한 하였다고 전해지는데요. 나폴레옹과 히틀러도 하지 못했던 브리타니아 원정을 통하여 지금의 영국을 정복하였다고도 하는데요 물론 당시의 브리타니아는 지금의 영국처럼 강력하지는 않았지만 카이사르 역시 당시로써는 매우 힘들었을 도버해엽을 건너 브리타니아 원정에 성공하였다고 합니다.

 

브리타니아

 

하지만 이렇게 브리타니아 원정에 성공한 카이사르 또한 위협에 삐지게 되는 돼요 갈리아 원정의 경우 약 8년간 전쟁을 치렀다고 하는데요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며 항상 로마군에 패배하였던 갈리아의 군대들도 슬슬 로마군의 전략과 전술을 밴치 마킹하며 반격에 나서는데요 그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지금의 프랑스 지역에 자리 잡고 있던 아르베니족의 부족장이었던 베르킨케토릭스라는 인물이라 합니다. 베르킨케토릭스는 서로 이해관계에 엃켜있던 갈리아부족들의 단합력을 한데로 끓어모으며 조직력을 강화하였고 단른한편으로는 로마군의 약점이었던 기동성과 적은 병력 그리고 군량보급문제를 타깃으로 하여 전쟁을 이끓어 갔다고 합니다. 이로인해 카이사르의 로마군은 큰 피해를 입으며 갈리아원정에서 패할 위기에까지 몰렸다고 하는데요. 베르킨케토릭스는 카이사르의 로마군 군량보급문제를 집중 공략하며 로마군이 갈리아에서 고립되도록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에 로마군은 군량을 구하기위하여 흩어지면 빠른 기동력의 기병을 이용하여 각개격파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베르킨케토릭스는 청야 전술을 통하여 로마군이 약탈할 수 있는 부족의 마을 들을 모두 불태워 식량난을 야기시켰다고 하는데요 이에 카이사르의 로마군은 10일 치의 식량밖에 남지 않은 위기에 몰리고 맙니다. 하지만 이때 카이사르에게 엄청난 행운이 찾아오는데요. 베르킨케토릭스의 청야 전술에서 빠진 아바리쿰 이라는 유서 깊은 한 도시가 남아있었고 이에 카이사르는 그 도시를 습격하여 함락시킨 후  4만 명의 주민을 학살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카이사르는 2년 치의 식량을 확보하였다고 합니다.

베르킨케토릭스

2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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