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트랍 c입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약 20년 전에 페르시아만에서 일어났던 걸프전쟁에 대하여 말해보려 합니다. 1990년 8월 2일 전운이 감돌던 중동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을 시작으로 UN에서는 결국 이라크를 침략자로 규정하며 UN 안정 보장 이사회를 긴급 소집하였습니다. 이후 유엔 안보리는 최후통첩을 통하여 91년 1월 15일까지 무조건적인 철수를 명령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라크는 유엔을 무시하였고 이에 유엔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약 34개국으로 다국적군을 결성하여 드디어 1991년 1월 17일 새벽 다국적군은 이라크에 기습공격을 하며 본격적인 걸프전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걸프전은 2차 대전 이후 급속도로 발전한 군수산업의 신제품 발표장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오래된 무기의 제고처리와도 같았는데요 당시까지 봐 온 적 없던 현대전을 전 세계사람들이 TV를 통하여 시청하였고 당시 지역방송에 불과하던 CNN의 경우 종군기자를 전장 깊숙이 파견하며 대형 방송사 로더 거듭나기도 하였습니다.
1980년대 이라크는 이란과 약 8년간에 전쟁을 치렀는데요 그로 인해 이라크의 모든 경제는 파탄 상태였으며 이로 인해 이라크는 많인 아랍국가들로부터 많은 돌을 빌린상태였다고 하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를 회복하기 어려웠던 이라크는 다시 쿠웨이트에 손을 내밀게 됩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이라크는 쿠웨이트로부터 약 140억 달러를 빌렸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를 회복하기 어려웠던 이라크는 쿠웨이트에 140억 달러의 탕감과 함께 100억 달러의 긴급차관까지 요구하게 되는데요. 이에 쿠웨이트는 탕감을 거절하며 5억 달러 정도 긴급차관을 빌려줄 수 있다고 합니다. 일반적인 관점으로는 이라크의 행동이 아주 어처구니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당시까지 쿠웨이트는 돈으로 평화를 사는 중이었으며. 그런 식에 해결책은 오래가지 못하다는 것 또한 보여주는데요. 당시 이라크는 자신들이 중동의 맹주라 생각하였으며 쿠웨이트의 거절에 결국 이라크는 쿠웨이트 침공을 결정합니다.
요르단의 경우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있었는지 중재를 하려 하였지만 당시 이라크 대통령 사담 후세인은 쿠웨이트가 너무 혼란스러워 정세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들어간 거지 침략은 아니라는 어처구니없는 말로 일관하기도 하였는데요 결국 서방국가들은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인한 유가 불안정과 맞물려 결국 다국적군을 파견합니다. 하편 친 이라크 성향의 소련 또한 이라크를 비난하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걸프전은 다국적군의 참전으로 십여 일 만에 다국적군과 쿠웨이트의 승리로 끝나는데요. 하지만 전쟁 초반. 미국은 장기적인 소모전을 예상하기도 하였다고 하는데요 전쟁 초반 미국은 사막의 방패 작전을 펼치는데요 먼저 미 육군 82 공수사단을 먼저 사우디아라비아로 파견하여 방어막을 형성하며 이후 도착할 미군의 교두보 역할을 합니다. 이후 두 번째 작전인 사막의 폭풍 작전을 펼치며 항공전을 시작하는데요 이 항공전으로 이라크의 주요 전략적 기지들을 파괴하였으며 이후 육군을 투입하여 마무리를 하였습니다. 결국 이라크는 쿠웨이트에서 다국적군에 밀려 이라크로 다시 철수하면서 걸프전이 마무리되는데요 이후 사담 후세인 빈라데등이 미국과의 악연으로 다시 한번 나타나게 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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